[칼럼] 동학농민명예회복법 흔들기 이제는 멈춰야 한다
[칼럼] 동학농민명예회복법 흔들기 이제는 멈춰야 한다
  • 형상희 기자
  • 승인 2021.12.10 11: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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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청 상하수도사업소 관리팀장 전민중
고창군청 상하수도사업소 관리팀장 전민중

현행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약칭 동학농민명예회복법)’ 제2조에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 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물론 1894년 3월은 고창 무장 기포일을 가리킨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특별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고 있다. 1894년 1월 고부봉기를 동학농민혁명(이하 ‘혁명’)의 시작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고부봉기 또한 나름대로의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 봉기를 소중히 여기는 해당 지역 주민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혁명의 범주에 고부봉기가 포함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미흡한 점이 많아 혁명의 정신을 드높이지 못하고 오히려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부족한 점 몇 가지를 예로 들면 아래와 같다.

첫째, 사발통문의 사실성 부족이다. 사발통문은 서울까지 진격하고자 계획했던 고부봉기의 혁명적 성격을 잘 말해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통문은 고부봉기에 사용되었던 원본이 아니다. 한 사람 필체이면서 당시 통문 형식과 맞지도 않는다. 결론적으로 많은 세월이 흐른 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두서없이 쓰여졌다고 봄이 타당하다.

사실 ‘고부봉기 때 고부성 점령’과 ‘무장기포 후 고부성 재점령’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그리 크지 않다. 따라서 두 사건의 개별 사실들에 있어 혼동이 있을 수 있으며 미화되었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실제 서울대 신용하 명예교수와 동학역사 연구대가 표영삼 등 다수의 학자들은 사발통문에 있어 여러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둘째, 지도부의 지도력 부족이다. 많은 대중을 결집할려면 지도부가 죽기를 각오하고 떳떳이 이름을 밝혀 대의를 선포하는 것이 기본 중에 기본이다. 그러나 이러함이 없이 주모자를 알 수 없게 비밀리에 추진하는 사발통문 만을 사용한 것은 지도부 의식이 민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증거다.

셋째, 참여 주민들의 시대의식 부족이다. 당시 지역 주민들은 조병갑의 익산군수로의 전임(專任)과 고부군수로의 잉임(仍任)에 따라 해산과 결집을 하였고, 후임으로 온 군수 박원명의 회유에 의해 지역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고 흩어져 버렸다. 시대의식의 한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이에 반해 무장기포는 인근 지역주민 4000여명이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평등한 세상, 정의로운 사회 실현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또한 한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반역이라는 조선 후기 시대 인식의 한계와 두려움을 처음으로 극복하고 죽기를 각오하면서 무장포고문을 대내외에 선포한 중대한 날이기도 하다.

결국 이러한 전후 사정들을 감안할 때 고부봉기는 혁명의 시작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더 이상의 특별법 흔들기는 명분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을 계기로 모든 한국사 교과서에 수록된 무장기포의 역사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널리 홍보함으로써 혁명 참여자들의 위상이 한층 높아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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